예술인

이매방(李梅芳, 1927. 5. 5 ~ 2015.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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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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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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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0
이매방(李梅芳, 본명:이규태李奎泰, 호:우봉宇峰) 선생 약력
1926년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에서 태어나 조부 이대조, 박영구, 이창조 문하에서 전통춤을 사사
1935년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 입학
1941년 임방울 명인명창대회 공연(승무)
1943년 목포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1955년 이매방 무용발표회(광주극장)
1976년 부산시 눌원문화상
1984년 옥관문화훈장(4등급)
1987년 7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
1988년 서울올림픽게임 문화예술축전 공연 참가
1988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수상
1990년 10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
1993년 인간문화재진흥회 부회장
1995년 성옥문화상
1996년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1998년 아비뇽페스티벌 참가
1998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오피시에
1999년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국립극장 대극장)
2004년 임방울 국악상, 세종국악대상
2011년 제12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공로상
2011년 6월 18일 19:30~21:00 국악FM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전통춤 명인 이매방 편(진행:노재명)에 출연
2013년 국가무형문화제 제27호 승무, 97호 살풀이 명예보유자
2015년 은관문화훈장(2등급) 추서


*아랫글의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정보에 2015년 10월 5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s://chf.or.kr/c2/sub2_2.jsp?thisPage=1&searchField=&searchText=&brdType=R&bbIdx=102985

[2015.10] 宇峰우봉 이매방 선생의 춤 일생 - 글 : 이병옥 (용인대학교 명예교수) -

한국 전통춤의 대부 우봉(宇峰)
1950년대 삼고무 초기 모습이매방 선생님이 2015년 8월 7일 8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우봉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하늘이 내린 춤꾼’으로 칭송되는 근현대 전통춤계의 중심인물이었다.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다.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은 후 평생 외길 춤인생을 걸으면서 두 종목의 인간문화재로 그 명성과 수많은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우봉 이매방의 춤사위는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는 표현을 넘어 ‘밀레니엄에 한 번 날까’하는 역사적인 존재라고 할 만큼 전통춤의 진수를 전승시킨 인물이다.
그러면 우봉 이매방이 어떤 계기와 학습과정으로 전통춤의 대부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춤 일생을 살아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춤 성향을 가늠하는 입문과정과 열정

위쪽부터 1978년 이매방 승무 / 1938년 정포소학교 고개 숙인 이가 이매방 우측 앞첫째는 이매방이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 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는 그가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여 남자이지만 여성적인 고운 춤사위 성향인 기방춤의 기틀을 마련한 점이다.
둘째,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점이다.
셋째, 중국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나 춤에 색다른 영향을 받은 점이다.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을 따라 약 5년간을 살게 되었을 때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의 무용공연에도 출연하였고,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6·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매란방’의 약자를 딸 정도로 그의 예술혼이 깃든 것이었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전통춤에 정진하게 되었다.
넷째는 주말마다 광주 권번에 다니면서 권번 선생이었던 박영구로부터 승무와 북놀이를 배우고 이창조(장성출신) 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한 점이다. 이처럼 목포 권번과 광주 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공연은 1942년(16세)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주관하는 명인명창대회였다. 이때 승무를 출 박봉선이 사정이 생기자 함국향이 이매방을 임방울에게 소개하여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으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또 예술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후로는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서 삼고무를 가르쳤고, 그해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당당히 승무로 출연하게 되었다.

방랑생활 속에서도 다양한 춤 정립(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

1970년 이매방 선생 사진이미지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목포에 내려와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시 최승희의 딸 안성희는 <장검무>, 전황(본명 전두황)은 <처녀총각> 등을 추었으며, 이어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 때문에 곤욕을 치렀으나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 종군연예인공연단)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에 본부를 두어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던 중,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 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서 함께 연구소를 했으며, 부산 제자로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국악원을 개설하여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 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다시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 잡고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도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 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 근거지는 사실상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1958년에 부산공연을 올리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1960년대는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으며, 그 후 5고무,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 <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이매방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오늘날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승무, 살풀이춤 인간문화재와 국무(國舞)로 추앙

이매방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교수이며 문화재 위원이었던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 30일 서울 YMCA에서 열린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발표하면서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신문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2004년~2008년 이매방 선생 사진 이미지이매방 춤판의 최고 결정판은 <북소리> 시리즈였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 1990년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북소리Ⅲ>(호암아트홀), 그리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끈질긴 노력으로 1987년 7월 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이어 1990년 10월 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도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후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과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2007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며, 매년 제자들과 함께 정기공연을 하였다. 전통춤경연대회 및 300여 명에 이르는 승무와 살풀이춤 이수자들과 제자들의 공연에도 찬조출연과 반주를 직접 해주는 열정을 최근까지 지속하였다.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2012년 이매방 선생 사진 이미지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춤기법의 중심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으로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 나온다.
결국 이매방 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國舞)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매방의 일생을 통해 그가 가진 춤의 예술적 가치를 요약하면,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 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 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세계적인 경극과 춤의 명인 매란방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예술혼을 불태우고 인생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여섯째, 80평생 춤추는 것 외에는 남자로서 어떤 직함도 직책도 직업도 가진 바 없이 오로지 춤만 추어온 외길 인생이기 때문이다. 춤이 곧 이매방의 삶이며 생명이며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일곱째, 호남지역춤과 기방계통춤이라는 ‘국지성’에서 출발하였지만 경향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범한국적 전통춤의 ‘국가성’으로 거듭났으며, 국제무대에도 우리 전통춤의 ‘세계성’을 알리고 확인하는 독창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이매방 춤이 가지는 예술적 의의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매방은 1927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민족 수난 속에서도 춤을 배웠고, 해방과 6·25전쟁 통에서도 오로지 춤만을 추었고, 외래문명의 홍수와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꿋꿋이 춤만 추어 한국 전통춤의 위상을 높였고, 세계 속에 한국춤의 지평을 열어 대한민국 시대의 전통춤 패러다임을 구축하였기에 국무적 존재로 인정받아 온 것이다.